[생애]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거리의 악사였던 아버지와 바흐가 세례를 받은 성 게오르크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사촌형의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바흐 가문은 중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 집안이었다.
9세가 된 1694년 5월 어머니를 여의고 다음해 2월에 아버지를 여읜 바흐는 오르드루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밑에서 자랐다. 맏형은 우수한 음악가였고, 오르간 연주와 작곡 등을 바흐에게 많이 가르쳐주었다. 열람을 금지한 형 소유의 악곡집을 보고 싶은 나머지 매일 한밤 중에 일어나 달빛 아래서 악보를 베꼈다는 소년 바흐의 열성에 대한 일화도 남아 있다.
1700년 3월 바흐는 오르드루프를 뒤로 하고 뤼네부르크로 향했다. 성 미카엘 교회 합창단에 채용되고 미카엘 학교에서 공부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뤼네부르크 시절의 바흐는 가까운 함부르크에서 라인켄의 오르간 예술과 카이저의 오페라, 또 첼레에서는 프랑스 음악에 접할 기회를 얻었다. 뤼네부르크 성 요하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거장(巨匠) 뵘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1702년 봄, 미카엘 학교를 끝낸 바흐는 다음해 3월부터 6개월간 바이마르공(公) 요한 에른스트의 궁정 악사를 지낸 뒤 아른슈타트 신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바흐에게 있어 이곳의 4년간은 모순과 문제로 가득찬 생활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도 있는 성가대와의 관계가 나빠져 결국에는 싸우게 되고, 더욱이 4주간의 휴가를 얻은 뤼베크 여행도 4배나 길어져 성직 회의에서 꾸지람을 받았다.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북스테후데의 예술은 젊은 바흐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바흐는 뮐하우젠으로 옮겨 뮐하우젠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1707년 4월 부활절에 실시된 시험 연주에서는 칸타타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 4)>가 연주되어 그의 눈부신 칸타타 창작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불과 1년간인 뮐하우젠 시절에는 <주여, 깊은 심연에서 당신을 부르나이다(BWV 131)> <하느님의 때는 최상의 때(BWV 106)> <하느님은 나의 왕이시도다(BWV71)>와 같은 걸작이 쓰여졌다.
첫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1707년 결혼했다.
1708년 6월 바흐는 뮐하우젠시 참사회에 갑자기 사표를 내고 바이마르 궁정 오르간 연주자 겸 궁정 악사가 된다. <오르간 소곡집(BWV 599-644)>을 비롯하여 훌륭한 많은 오르간곡을 작곡하였다.
요한 에른스트의 부탁으로 비발디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오르간과 쳄발로의 독주용으로 편곡하였다.
1714년 악사장으로 승진한 바흐는 매월 한 곡의 비율로 신작 칸타타를 연주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하늘의 왕이시여, 어서 오소서(BWV182)> <눈물 흘리며 탄식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다(BWV12)> <나의 마음은 피바다를 건너노라(BWV199)>를 비롯한 바이마르 칸타타가 많이 생겨났다.
1716년 12월 악장 드레제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에 그의 아들이 지명되어 바흐는 승진의 길을 놓쳤다. 새로운 가능성을 밖에서 찾은 그에게 쾨텐 궁정 악장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바이마르공은 바흐의 사직을 허락하기는 커녕 1개월 금고형을 내렸다.
1717년 12월 금고에 굴하지 않고 바흐는 쾨텐으로 옮겨갔다. 음악을 즐기는 군주 레오폴트 후작은 우수한 궁정 악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바흐도 많은 실내악곡과 협주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20년,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고, 음악 예산이 삭감됨에 따라 그는 다시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함부르크 성 야코프 교회 오르간 연주자에 응모하고, 1721년 3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에게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집(BWV 1046-1051)>을 바친 것이 그 표적으로서, 1723년에는 라이프치히로 옮기게 되었다. 이 무렵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BWV 1001∼1006, 1720)> <평균율 피아노곡집 제1권(BWV 846∼869, 1722)>의 자필 정서보가 완성되었다. 1721년에 안나 마크달레나와 재혼하였다.
1723년 5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칸토르 겸 음악 감독에 취임한 바흐는 토마스 학교에서의 교육, 라이프치히의 주요 4교회에 교회 음악 공급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매주 예배 때 연주되기 때문에 200곡에 가까운 교회 칸타타와 <마태복음> <요한복음>에 바탕을 둔 수난곡이 작곡되었다.
특히 1727년에 초연된 <마태 수난곡>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30년은 전환기여서, 종교곡 대신에 협주곡과 세속 칸타타인 <커피 칸타타:가만히 입다물고 말하지 말아요(BWV211)> <농민칸타타:우리들의 새 영주님(BWV212)>등의 창작 비중이 커졌다. 계몽주의 영향에 따른 감각적이고 알기 쉬운 음악의 융성 때문에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간주한 바흐는 점차 자기 예술의 집대성을 목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작품 <피아노 연습곡(제1부-제4부, 1731-42)> <음악의 헌정(BWV 1079, 1747)> <슈블러 코럴집 (BWV 645∼650, 1748)>이 출판되었다. <푸가 작곡기법(BWV 1080, 1740)>이 작곡되고 <미사곡 b단조(BWV232)>가 완성된 것도 이 일환에서이다.
마지막 작품이 된 이 장대한 미사곡은, 1733년에 작센 선제후(選帝侯)에게 바친 키리에(kyrie)·글로리아(gloria)를 제1부로 하였으며, 역시 기존의 상투스(sanctus)를 이용하면서 말년인 1748년 가을부터 실명 직전인 다음해 봄에 이르러 나머지 부분을 작곡하여, 완전한 미사곡이 되었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성악 폴리포니 양식에서 당시 최신의 화려한 양식에 이르는 성악 작곡법의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리하여 바흐는 서양 음악사상 일대 기념비를 스스로 세운 뒤 그 생애를 마쳤다.
[음악의 특징 및 업적]
바흐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단정하고 고상하다. 이 점에서는 고전파와 통하지만 고전파 음악이 명쾌한 선율과 단순한 화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비해, 바흐의 음악은 화성면에서 매우 복잡 다양하다. 그의 음악은 경쾌한 화성 리듬으로 곡이 진행되고 7도, 9도의 괘류(掛留)에 의한 불협화음이 빈번히 나타나고 종종 푸가 풍인 모방이 나타나는 등 음악의 텍스추어가 치밀하다. 따라서 바흐의 음악은 감각적으로, 혹은 심각한 마음가짐으로 인생론적으로 듣기보다는 음악 기하학적 구성을 듣는다는 태도가 더 알맞다. 그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긴장감이 높은 변화 화성을 사용한 점, 과감하고 늠름한 에너지를 간직한 동기나 선율의 구성, 정밀하고 섬세한 박절법(Metrik)의 구성, 단일 소재에 의한 전체의 통일 등을 들 수 있다.
바흐는 수난곡, 교회 칸타타, 오르간곡, 협주곡, 무곡, 복합창 형식, 코랄, 실내 소나타, 교회 소나타, 모음곡, 푸가, 각종 모든 스타일의 관현악 신포니아 등 오페라를 제외한 음악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이렇게 당시 알려진 거의 모든 작곡 방식에 능숙했다. 하지만 그는 독창적으로 새로운 기법이나 장르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17세기 초에 시작된 바로크 음악을 흡수하여 바흐 특유의 방법으로 표출, 작곡하여 그 완성을 기했다. 초기에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한 바흐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이미 독일의 궁정 음악에 침투하지 않고 있던 외국 음악 양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소화 흡수해 내었다.
바흐는 성악 쪽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악 쪽에서도 독일 음악의 정통성과 우수성을 확립해 준 커다란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 위대한 공적은 여러 방면으로 부활되어 나타나고 있다. 엄격한 대위법과 자유로운 푸가 및 변주 기법의 발달은 모두가 그 연원을 바흐에게 두고 있다는 데서 위대하며, 그러한 밑받침으로 하여 관현악법의 비약적인 전개를 보인 고전주의-낭만주의의 도래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주요작품]
마태 수난곡(Matthauspassion)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26장과 27장에 기록된 예수 수난을 주제로 한 곡.
많은 작곡가들이 마태 수난곡을 작곡했으나, 가톨릭에서는 오브레히트와 라소의 작품이,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발터·쉬츠·바흐의 작품을 선호한다. 특히 쉬츠와 바흐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며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전체 78곡(새로운 판에는 6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2부 78곡)>은 1723년에 초연한 <요한 수난곡>과 함께 그의 종교 음악의 정점을 이룬 작품으로 중요하다.
작곡된 시기는 1723년 이후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절로 추정되며, 1729년의 성금요일(4월 15일)에 연주된 것이 확인되었다. 가사는 <마태오 복음> 제26·27장과 헨리치(필명 피칸더)의 자유시에 의한다.
초연한 뒤 100년째 되는 1829년에 멘델스존이 다시 연주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푸가 기법(Die Kunstder Fuge)
바흐의 미완성 대작(작품 1080).
15곡의 푸가와 4곡의 카논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바흐가 죽은 뒤 1751년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다.
기본 주제와 다양한 변형의 악곡들이 복잡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전에는 바흐의 말년인 1749년 무렵의 작품으로 여겨왔으나, 최근에는 여러 악곡이 1740년대 초기 작품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자필 악보와 1751년 초판 악보 사이에 곡수 및 배열 순서에 큰 차이가 있고, 악기 편성이 지정되어 있지 않는 등 작품의 전체적 구성에 관한 의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오랫동안 푸가와 카논의 범례집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나, 1927년 전곡이 초연된 뒤 재평가되어 푸가 기법의 모든 유형이 집대성된 서양 음악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음악의 헌정
작품번호 1079. 1947년 바흐가 카이저링크 백작을 통하여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을 방문했을 때 대왕으로부터 즉흥 연주를 의뢰받아 그 자리에서 푸가 즉흥 연주를 하였다. 바흐는 다음날 연주회에서도 즉흥 연주를 한 뒤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왕이 주었던 주제를 바탕으로 이 곡을 완성하였다.
음악에 대한 왕의 관심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다양한 대위법 형식의 13개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3개 소품 모두 바흐가 궁정을 방문하였을 때 왕이 그에게 제시한 주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 10곡은 왕의 주제에 의한 카논이고, 1곡은 왕의 악기인 플루트를 위한 트리오 소나타이며, 나머지 2곡은 푸가의 초기 형태인 리체르카레이다.
바흐는 완성 작품에 헌사를 덧붙여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하였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ische Konzerte)
BWV 1046∼1051. 1718년에서 1721년에 걸쳐 쾨텐에서 궁정 악단을 위해 쓰여졌으며, 1721년 브란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각 곡이 제각기 악기 편성을 달리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협주곡 형식과 독일의 대위법 기술을 병용하여 바로크 협주곡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양식적으로는 제1번(바장조) · 제2번(바장조)이 합주 협주곡, 제3번(사장조) · 제6번(내림나장조)이 콘체르토 심포니아이며, 제4번(사장조) · 제5번(라장조)은 보다 새로운 독주협주곡에 접근하고 있다. 바흐는 이 중 몇 개의 악장을 칸타타로 전용하여 제4번은 《하프시코드협주곡》 제6번으로 편곡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Das wohltemperierte Klavier)
2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제1권은 1722년, 제2권은 1744년에 완성되었다. 각 권에 똑같이 24곡의 전주곡과 푸가가 들어 있으며 C장조에서 비롯하여 24의 장조와 단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 이는 당시 실용화되기 시작한 평균율이라는 새로윤 조율법에 의한 것으로 그 기술적인 가능성을 대담하게 탐구하고 있음과 동시에 건반음악 사상 비길 바 없는 예술적 표현을 이룩하고 있다. 원래는 하프시코드나 클라비 코드를 위해서 쓰인 것이지만, 현재는 피아노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으며 ‘피아노 음악의 구약성서’로도 불리고 있다. 아들과 제자의 교육을 목적으로 쓰여졌으며 오늘날에도 피아노 학습에 없어서는 안 될 교재이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Weihnachts Oratorium)
1734년에 작곡되었으며, 성서·찬송가에 자유시를 곁들여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노래한 대곡으로 《마태오》,《요한》의 양 수난곡 및 《b단조 미사》와 함께 그의 4대 종교곡으로 꼽힌다. 전 6부작으로 각 부분이 칸타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알맞게 표현이 밝으며 세속 칸타타로부터의 패러디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친근해지기 쉬운 작품이다. 이 밖에 17세기 독일의 작곡가 쉬츠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644)도 유명하다.
인벤션(invention)
1722년에 완성된 것으로 모두 30곡으로 이루어졌다. 바흐는 이 중 2성 15곡에 대하여 이 명칭을 붙이고 3성 15곡에 대해서는 따로 《신포니아:sinfonia》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현재는 30곡 모두 《인벤션》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이 곡을 연주 기술의 기초뿐만 아니라 작곡에서도 기초가 되도록 꾀하였다. 다같이 단일 악상(樂想)을 대위법적으로 전개하여 쓰고 있으며 소품이면서도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데가 있다. 지금도 피아노 학습에는 없어서는 안 될 작품으로 꼽힌다.
[해당 음악사 시대에 관한 기술]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의 탄생 이후 두 번째의 신음악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 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 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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