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pre>쇼팽의 증조부 쇼프(Szop)는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이름인 쇼팽으로 고쳤다.
그 손자 니콜라스가 조국 폴란드로 돌아와 1810년에 낳은 아들이 음악가인 쇼팽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54㎞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젤라조바 볼라 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아버지로,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1810년 3월 1일).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이미 신동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2세 무렵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아달베르트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쇼팽은 아무에게서도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으며,
1824년 무렵부터 음악에 몰두하여 그 이듬해에 최초의 작품 "론도"를 출판했다.
1828년 아버지의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서 받은 자극으로 귀국 후 그의 음악 활동은 한층 활발해졌다.
20세 때 빈으로 갔는데,당시 러시아와 협약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인을 적국인 으로 대하며
무시하고 또한 빈의 환락적인 분위기에 실망하여 파리로 가던도중 슈투트가르트에서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게 된다.
함께 빈 으로간 친구들이 모국의 위급에 앞을 다투어 귀국할 때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할 수 없었던 그는,
피아노에 의지해서 애국의 열정을 작곡에 기울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작곡한 곡이 "혁명"이다.쇼팽에튀드 혁명은 연습곡 이라기 보다 쇼팽의 통한이 담긴 피아노로 표햔한
한편의 음유시라고 할수 있다.
1831년9월 기진맥진한 심신으로 파리에 들어선 그는 동경하던 파리에 왔지만 파리는 무명의 천재를
당장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돈도 떨어지고 건강도 좋지 않았던 쇼팽은 6개월동안 어지간히 고생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파리의 살 플레옐에서 가졌던 데뷔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의 사교계는 섬세하고 고상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찍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본 리스트가 이 천재를 인정하여 파리 악단에 소개했기 때문에,
파리는 그를 피아노의 명연주가로서 환영하기 시작했다.
쇼팽은 차츰 안정된 생활에 정착 하게되어 작곡 면에서도 새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할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 이면서도, 부드럽고 정교하고 독특한,옥구슬이 구르듯
흐르는 예술의 삼매경,그러면서도 악상이 대담하고 독창적인 쇼팽의 음악은 완전히 독자적인 악곡의 형태를
만들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술에의 정진과는 반대로, 결핵은 차츰 쇼팽의 육신을 좀먹어 갔다.
한때 병세가 조금 회복되어 그는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그를 과로에 빠뜨려 그는 더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생명이 꺼져갔다.
1849년 10월 17일,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시체는 해부되었으며, 2주일 뒤에 마드레느 사원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임이 연주되는 속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유해는, 1830년에 폴란드를 떠날 때 친구들이 병에 담아 준 조국의 흙에 덮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묻혔다.
또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교회에 보내졌다.
헝가리의 리스트, 독일의 슈만 등과 함께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쇼팽은 실로 주옥같은 많은 곡을 남겼느데
즉흥곡 · 뱃노래 · 녹턴 · 마주르카 · 스케르초 · 왈츠 · 폴로네이즈 · 연습곡 · 전주곡 · 발라드 등, 어느 것이나
쇼팽고유의 피아노곡 형식을 취했으며,그외 6개의 관현악곡,3개의 소나타, 3개의 실내악곡,17개의 가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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